남자는 핑크? 과거에는 분홍색이 강인한 남성의 색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분홍색은 여성성, 부드러움, 섬세함의 상징으로 통용됩니다. 여아용 장난감, 의류, 액세서리 등은 으레 분홍색으로 채색되며, ‘남자는 핑크’라는 말은 오히려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시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지극히 현대적인 관념에 불과하며,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분홍색은 강인함과 권위를 상징하는 남성의 색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색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시대적, 문화적 산물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역사적 대전환은 단순한 유행의 변화를 넘어, 사회 구조와 성 역할에 대한 담론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분홍색이 지녔던 본래의 남성적 상징성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심도 있게 고찰하고, 어떠한 사회문화적 동인에 의해 그 의미가 180도 전복되었는지를 추적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색채라는 시각적 기호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얼마나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성별과 색의 연관성이 얼마나 인위적으로 구성된 개념인지를 통찰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는 것을 넘어,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무의식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할 것입니다.
피와 열정의 상징, 남성성을 품었던 분홍색
분홍색이 남성의 색으로 여겨졌던 역사적 근원은 18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분홍색은 독립된 색이라기보다는 붉은색(Red)의 옅은 파생색, 즉 ‘작은 붉은색(Little Red)’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서구 문화권에서 붉은색은 전통적으로 피, 전쟁, 열정, 권력과 같이 강렬하고 남성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군복이나 왕족의 예복에 붉은색이 널리 사용된 것도 이러한 상징체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붉은색의 기운을 그대로 물려받은 분홍색은 자연스럽게 남성 아이, 즉 미래에 강인한 남성으로 성장할 소년들에게 어울리는 색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갑옷을 축소하여 아들에게 입히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수많은 초상화에서는 분홍색 실크 코트나 조끼를 차려입은 귀족 남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분홍색이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세련된 남성의 색이었음을 명백히 증명합니다. 당시 분홍색 염료는 브라질 소목이나 연지벌레 등에서 추출하는 고가의 재료였기에, 값비싼 분홍색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푸른색(Blue)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져 차분함, 순결함, 겸손함 등 여성적인 덕목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19세기까지도 이어져, 1918년 미국의 유력 유아 잡지인 ‘언쇼의 유아용품 리뷰(Earnshaw's Infants' Department)’에서는 “분홍색은 보다 단호하고 강한 색이므로 남자아이에게 더 적합하고, 파란색은 더 섬세하고 아기자기하므로 여자아이에게 어울린다”고 명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분홍색이 지닌 남성성의 역사는 색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닌, 특정 시대의 문화적 합의와 상징체계가 색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마케팅이 빚어낸 대전환, 분홍색의 여성화
분홍색이 남성성의 상징에서 여성성의 전유물로 탈바꿈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대량생산 및 소비 사회의 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도 유아복은 성별 구분 없이 실용적인 흰색이 주를 이루었으나, 20세기 초 백화점과 기성복 산업이 발달하면서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들은 소비자들의 구매를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성별에 따른 색상 구분’이었습니다. 상품을 성별에 따라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명확히 나누어 놓으면, 아들과 딸을 모두 둔 가정이라도 옷을 물려 입히기 어려워져 새로운 제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어떤 색을 어떤 성별에 할당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명확하지 않아 혼란기가 존재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20세기 초반까지도 분홍색을 남자아이의 색으로 추천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분홍색=여아, 파란색=남아’라는 공식이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남성들이 일터로 복귀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사회 활동을 하던 여성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장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부드럽고 화사한 분홍색은 이러한 시대적 여성상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색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영부인이었던 매미 아이젠하워(Mamie Eisenhower)가 공식 석상에서 분홍색 드레스와 장신구를 즐겨 착용하면서 ‘매미 핑크(Mamie Pink)’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고, 분홍색은 이상적인 주부와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대중의 뇌리에 강력하게 각인되었습니다. 이처럼 분홍색의 성별 상징성 역전은 자연스러운 문화적 흐름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필요와 시대적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마케팅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고정관념을 넘어, 다채로운 의미를 품은 현대의 분홍색
20세기를 거치며 확고하게 여성의 색으로 자리 잡았던 분홍색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또다시 의미의 변혁을 겪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형성된 견고한 성 역할 고정관념이 해체되고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와 같은 새로운 성 정체성 담론이 부상하면서, 색채에 덧씌워진 성별의 굴레 역시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성이 분홍색 셔츠나 넥타이를 착용하는 것은 더 이상 파격적이거나 금기시되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개성과 자신감을 표현하는 세련된 방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는 분홍색이 지닌 ‘부드러움’이라는 속성이 남성성에서 배제되어야 할 약점이 아니라, 현대 남성이 갖추어야 할 새로운 덕목, 즉 공감 능력과 섬세함, 내면의 강인함 등으로 재해석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패션 업계는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런웨이에서 남성 모델에게 다양한 톤의 분홍색 의상을 선보이며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지속했고, 이는 대중문화와 스트리트 패션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분홍색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상징으로도 활용됩니다. 유방암 인식 개선 캠페인의 상징인 ‘핑크 리본’은 분홍색을 연대와 희망, 건강한 생명력의 의미로 확장시켰으며, 일부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성의 상징이었던 분홍색을 역으로 차용하여 저항과 주체성의 목소리를 내는 전복적인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분홍색은 과거의 남성적 상징이나 20세기의 여성적 상징이라는 단일한 의미에 갇히지 않고,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신념을 표현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기호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분홍색의 역사는 결국 색채의 의미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약속과 합의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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