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브라운(Mummy Brown): 실제 미라를 갈아서 만든 물감의 진실

미라 브라운(Mummy Brown): 실제 미라를 갈아서 만든 물감의 진실

미술의 역사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연대기를 넘어, 시대의 욕망과 광기, 그리고 윤리적 딜레마를 품고 있는 거대한 서사시와 같다. 그중에서도 ‘미라 브라운(Mummy Brown)’이라는 안료의 존재는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훼손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갈색 물감은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곱게 갈아 만든 실제 인체의 분말로 제작되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화가들의 팔레트 위에서 사랑받았던 이 안료는 단순한 색채 재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 유럽을 휩쓴 이집트마니아(Egyptomania)의 광풍, 제국주의적 약탈의 역사, 그리고 예술적 표현의 자유와 생명 윤리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상징하는 시대의 유물이었다. 미라 브라운이 지닌 특유의 투명하고 깊이 있는 색감은 당대 화가들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수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 가루가 되어버린 고대인의 비극이 서려 있었다. 이 글은 한때 예술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대의 영혼, 미라 브라운의 탄생과 영광, 그리고 그 소멸에 얽힌 진실을 심도 있게 탐구하며, 예술과 윤리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예술의 제단에 바쳐진 고대의 영혼

미라 브라운의 기원은 고대 의약품으로 사용되던 ‘무미아(Mumia)’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무미아는 페르시아어로 역청(瀝靑)이나 아스팔트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고대 이집트 미라 제작 과정에서 방부 처리를 위해 사용된 검은 수지 물질을 지칭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단어의 의미는 와전되었고, 유럽인들은 미라 자체를 갈아 만든 가루가 만병통치약이라는 맹신을 갖게 되었다. 12세기부터 약재로 거래되던 미라 가루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새로운 용도를 찾게 되는데, 바로 화가들의 팔레트 위에서였다. 예술가들은 미라 제작에 사용된 역청과 수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색감에 주목했다. 초기 미라 브라운은 약재로 쓰이고 남은 찌꺼기나 품질이 낮은 미라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기묘한 안료가 본격적으로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와 19세기, 유럽 사회 전반에 이집트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과 학문적 탐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집트마니아’ 시대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고대 유물이 대거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미라는 더 이상 신성하거나 존엄한 존재가 아닌, 수집과 연구, 심지어 오락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상류층 사이에서는 미라의 붕대를 풀어보는 ‘미라 파티(Mummy Unwrapping Parties)’가 유행할 정도였으니, 인간의 유해를 갈아 물감으로 만드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거리낌은 희박했다. 오히려 수천 년 전 파라오의 땅에서 온 신비로운 재료라는 사실이 안료에 특별한 가치와 매력을 부여했다. 이처럼 미라 브라운의 탄생은 예술적 필요성보다는 시대적 광기와 제국주의적 시선이 빚어낸 기이한 산물이었으며, 고대의 영혼은 그렇게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팔레트 위에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매혹적인 색감, 그 잔혹한 제조법

미라 브라운이 당대 화가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지닌 독특한 물리적 특성 때문이었다. 이 안료는 따뜻하면서도 깊이 있는 갈색을 띠었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투명도를 자랑했다. 이는 유화에서 여러 색층을 겹쳐 깊이감을 표현하는 글레이징(Glazing) 기법에 매우 이상적인 재료였음을 의미한다. 빛을 투과시키는 미라 브라운의 성질은 그림자에 부드러운 깊이를 더하고, 인물의 피부 톤을 표현하는 데 실물과 같은 미묘한 질감을 부여했다.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이 이 섬뜩한 재료에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마르탱 드롤링(Martin Drolling)의 작품 <인테리어(L'Intérieur d'une cuisine)>에 사용된 깊고 투명한 그림자는 미라 브라운의 전형적인 사용 예로 알려져 있으며, 외젠 들라크루아나 영국의 라파엘 전파 화가들 역시 이 안료를 애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매혹적인 색감 뒤에는 끔찍하고 비윤리적인 제조 과정이 숨어 있었다. 미라 브라운의 원료는 말 그대로 고대 이집트인의 미라, 때로는 고양이와 같은 동물의 미라까지 포함되었다. 런던과 파리의 화방들은 이집트에서 대량으로 수입된 미라를 통째로 사들여 건조시킨 후, 붕대와 유해를 분리하지 않은 채 거대한 맷돌로 갈아 분말로 만들었다. 이 가루를 아마인유와 같은 건성유와 섞으면 비로소 화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이 완성되었다. 문제는 원료가 되는 미라의 품질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떤 미라는 방부 처리에 역청과 수지가 풍부하게 사용된 반면, 어떤 미라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미라 브라운의 색상과 품질이 제조될 때마다 달라지는 결과를 낳았고, 화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물감의 정확한 색조나 내구성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떤 안료는 시간이 지나면서 검게 변하거나 갈라지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화가들은 미라 브라운의 독특한 미학적 효과를 얻는 대가로, 작품의 장기적인 보존에 대한 불안정성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들은 캔버스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수천 년의 시간을 간직한 한 인간의 마지막 흔적을 기꺼이 갈아 넣었던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안료, 그 윤리적 성찰

수 세기 동안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미라 브라운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했다. 우선, 양질의 미라 공급이 점차 줄어들었다. 고고학의 발전과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집트 정부는 미라의 무분별한 국외 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는 안료의 원료 수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화학 안료 기술의 발달로 미라 브라운의 색감을 대체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저렴한 합성 안료들이 등장하면서 예술가들은 더 이상 구태여 이 불안정한 재료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미라 브라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예술가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윤리적 각성이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물감의 원료가 실제 인간의 유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화가들은 큰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는 라파엘 전파를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의 이야기다. 그는 미라 브라운의 애용자였으나, 어느 날 화방 주인으로부터 그 원료의 진실을 전해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즉시 자신의 화실에 있던 미라 브라운 물감 튜브를 정원으로 가져가 정중하게 땅에 묻어주며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시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 이상 미라는 신비로운 이국의 상품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1964년, 영국의 유명 미술용품 제조사 로버슨(Roberson's)이 "더 이상 사용할 미라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미라 브라운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오늘날 ‘미라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물감은 산화철과 같은 광물 안료를 조합하여 색상만을 재현한 것일 뿐, 그 안에는 더 이상 고대의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 미라 브라운의 역사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결코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교훈을 남긴다. 그것은 예술이 시대의 윤리적 감수성과 무관할 수 없으며, 창작의 과정 역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워주는, 미술사 가장 어두운 페이지의 기록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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