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의 곤룡포 색깔: 붉은색(홍룡포)과 황금색(황룡포)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 색깔: 붉은색(홍룡포)과 황금색(황룡포)

조선시대 왕의 복식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용보(龍補)를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袞龍袍)일 것입니다. 사극과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이 홍룡포(紅龍袍)는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하필 붉은색이었을까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용(龍)과 황제(皇帝)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색은 황금색, 즉 황색(黃色)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황제들은 대대로 황룡포(黃龍袍)를 착용하며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과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국왕은 왜 황색이 아닌 적색의 곤룡포를 입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단순히 색채의 미학적 선택을 넘어, 조선이라는 국가가 처했던 국제적 위상과 외교적 현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국가 정체성의 변모라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조선 국왕의 곤룡포 색깔이 붉은색(홍룡포)으로 정착된 배경과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사상적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나아가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황금색(황룡포)으로 변화하게 되는 극적인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곤룡포의 색채 변화가 단순한 복식의 변화가 아닌, 한 나라의 운명과 주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상징이었음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붉은 용포, 왕의 권위와 시대의 그림자

조선시대 국왕의 상복(常服)이었던 곤룡포가 붉은색을 띠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를 지배하던 중화(中華) 중심의 천하관(天下觀)과 그에 따른 책봉-조공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따르면, 황색(黃色)은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토(土)에 해당하며, 이는 곧 세상의 중심인 황제(皇帝)를 의미하는 고유한 색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직 천자(天子)만이 황색 옷을 입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관념은 중국 역대 왕조를 통해 확고한 상징 체계로 자리 잡았습니다. 따라서 중국 황제는 오조룡보(五爪龍補, 발톱이 다섯 개인 용)를 수놓은 황룡포(黃龍袍)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독점적이고 신성한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조선은 명나라, 그리고 이후 청나라와 사대(事大) 관계를 맺은 제후국(諸侯國)의 지위를 가졌습니다. 이는 조선의 국왕이 황제가 아닌 왕(王)으로서,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는 형식적 절차를 거쳤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조선 국왕은 황제와 동일한 황색 곤룡포를 착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황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중화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조선은 황색 다음가는 존귀한 색으로 여겨지던 적색(赤色)을 곤룡포의 색으로 채택했습니다. 적색은 남쪽과 불(火)을 상징하며,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색으로서 강력한 힘과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즉, 홍룡포는 황제국의 황색보다는 한 단계 낮은 격식을 취하면서도, 제후국의 군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절묘한 타협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 국왕의 곤룡포에 새겨진 용보는 사조룡보(四爪龍補, 발톱이 네 개인 용)로, 황제의 오조룡보와 차이를 둠으로써 이러한 위계적 질서를 더욱 명확히 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홍룡포는 단순히 아름다운 왕의 옷이 아니라, 조선이 처한 외교적 현실과 그 속에서 국가의 자주성과 왕실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정치적 지혜가 응축된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붉은 용포는 조선이라는 왕국의 영광을 드러내는 동시에, 거대한 중화 질서라는 시대적 그늘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인 셈입니다.

황색과 적색, 동아시아 질서 속에 담긴 색의 정치학

곤룡포의 색을 둘러싼 황색과 적색의 구분은 단순한 색채의 차이를 넘어,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고도의 정치적 상징 체계, 즉 '색의 정치학'을 반영합니다. 이 체계의 정점에는 황색을 독점한 중화 황제가 존재했습니다. 황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받아 문명 세계 전체를 통치한다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의 시각적 구현체였습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문명(華)과 비문명(夷)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예법과 상징 체계를 받아들이는지의 여부였습니다. 따라서 주변국이 황제의 색인 황색을 사용하지 않고,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색을 사용하는 것은 중화 질서에 편입되어 문명국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조선이 선택한 적색 곤룡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조선은 자국 내에서는 해동천자(海東天子)라 불릴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군주였지만, 대외적으로는 명과 청의 제후국이라는 현실적인 외교 노선을 견지했습니다. 홍룡포의 채택은 이러한 이중적 위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안으로는 왕의 존엄을 세우고, 밖으로는 중화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실리 외교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결코 굴종적인 사대주의의 발로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냉철한 국제 정세 판단에 기반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은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거나 왕을 '폐하(陛下)'로 칭하는 등 황제국에 준하는 의례를 일부 사용하기도 했으나, 가장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복식에서만큼은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는 상징이 가진 강력한 정치적 파급력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선 국왕이 황룡포를 입었다면, 이는 단순한 복식 문제를 넘어 중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 선언이자 군사적 도발로 해석될 수 있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외교적, 군사적 압박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적색의 홍룡포는 조선 5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외교적 스탠스를 대변하는 상징물이며,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속에서 주체성을 지키며 생존해야 했던 조선의 고민과 지혜가 담겨 있는 역사적 유산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홍룡포에서 황룡포로, 제국을 선포한 군주의 의지

수백 년간 조선 국왕의 권위를 상징했던 붉은색의 홍룡포는 19세기 말,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고종(高宗) 황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조공-책봉 관계가 공식적으로 종결되는 등, 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가 급격히 붕괴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거센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종은 더 이상 제후국의 왕이 아닌,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의 황제로서 국가의 위상을 국제 사회에 천명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897년 10월 12일에 거행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였습니다. 고종은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 황제로서 고종이 입은 곤룡포는 더 이상 붉은색의 홍룡포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황금색의 황룡포(黃龍袍)였습니다. 홍룡포에서 황룡포로의 변화는 단순한 복식의 색깔 변경을 뛰어넘는, 중화 질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대등한 주권 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수백 년간 황제에게만 허락되었던 황색을 대한제국의 황제가 입음으로써,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동등한 자격의 제국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황룡포와 함께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왕을 칭하던 '전하(殿下)' 대신 황제를 칭하는 '폐하(陛下)'를 사용하며, 왕세자를 황태자(皇太子)로 격상하는 등 모든 의례와 제도를 황제국에 걸맞게 바꾸었습니다. 비록 대한제국의 역사는 열강의 침탈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비운을 맞았지만, 붉은 용포를 벗고 황금빛 용포를 입었던 그 순간은 외세의 압박 속에서도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려 했던 군주의 강한 의지와 민족의 염원이 담긴 상징적인 장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결국 곤룡포의 색은 한 시대의 국제 질서를 반영하는 거울이었으며, 그 색의 변화는 시대의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세우려 했던 주체적 노력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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